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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경제및 돈벌이 관련

경영자로서 배워야할 자세

by 돈굴이 2022.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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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창, 동향인의 의견을 경계할 것.

 동창, 동향인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좋다. 다감한 청춘시절을 같은 책상에서 배우고, 같은 개울에서 헤엄을 치면서 자란 만큼 초대면이라도 이야기가 통한다. 하물며 오랜 접촉이 있고 보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관계가 회사라는 일정한 틀 속에 옮겨지게 되면 오히려 폐해가 생긴다. 이른바 학벌, 지방색이 발생하게 된다. 이 파벌의 발생을 특히 경계하고 있는 것이 캐논 카메라 사장 미다 라이 쓰요시이다. 미다 라이는 홋카이도 대학 의학부 출신인데. 의학계에 있어서는 도쿄 대학과 게이오 대학의 파벌 싸움 때문에 울고 싶도록 쓴 맛을 본 만큼 파벌 싸움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미다 라이는 사원들 사이에서의 학교벌 동창회 같은 회합을 못 가지게 하고, 동시에 동창, 동향인의 의견이나 정보에는 경계심을 앞세우고 임원의 기용에 있어서도 지방색, 학벌에 사로잡히지 않고 철저한 인재 주의를 취했다. 그러니까 정보나 의견이 동향, 동창의 일파에 치우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회사 업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적절한 때에 결단을 내릴 수 있어 그 경영은 안정되어 있다. 이와 반대의 경우가 "오카야마 사투리를 듣고 싶거든 젠니쿠로 가라"는 야유를 받은 젠니쿠였다. 젠 닛 쿠 가 하네다 앞바다에서 130여 명의 추락사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일으켰을 때 사내외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비난은 동사 수뇌부가 동향회로 변했다는 것이다. 젠니쿠는 아사히 신문의 항공 부장이었던 나카노 가쓰요시가 중심이 되어 아사히 신문의 최고 간부이던 미도로 마스 이치를 사장으로 추대하여 창립한 회사이다. 그리고 사건 당시 미도로는 옛집인 아사히 신문으로 복귀하고 따라서 젠니쿠에서는 고문으로 물러나고 사장은 오카자키가 헤이 타 부사장은 후쿠 모도 류이치였다. 이 두 사람이 수뇌부에 앉은 것은 미도로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미도로와 같은 오카야마현 출신이라는 관계에서였다. 그 결과 임원회는 전사장, 현 사장, 부사장의 트리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더욱이 공교롭게도 오카자키가 금융계, 후쿠 모도가 관계라는 식으로 젠니쿠의 수뇌부에는 사무, 영업 출신이 많았다. 기술 출신의 임원으로는 전무인 도리이 세이지, 상무인 가와바다 세이이치, 와다나베 나오지 등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오카야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뒷전에 놓여 오카자키 등의 의사결정에는 참여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안전 제일주의의 항공회사이면서도 기술면에서의 정보, 지식이 부족하고 필요한 기술적 노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당시 이 동향회가 비참한 사고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2. 고언 하는 자를 멀리하지 말 것.

 일세를 풍미한 가부키의 5대째 명우인 이치가와 단쥬로는 "출세함에 따라 나쁜 점을 말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쁜 점을 말해 주는 사람을 곁에 둔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그 자만심을 항상 경계했다고 한다. 나쁜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경영자가 많을 터이지만 그 대표적 인물로서는 먼저 다이에이 사장 나가다 마사이치를 들 수 있다. 나가다의 원 맨은 유명하다. 그러나 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뭔가 새 사업을 계획해서 실행에 옮기기 전에는 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임원회에 말하고,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많은 종업원의 가부를 묻고 그런 다음에 실행에 옮기고 있다." 나가다는 새 사업을 계획하면 임원회의 석상에서 많은 임원들을 앞에 놓고 그 장기인 숫자와 통계를 나열하며 계획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기탄없이 말해 달라고 말했다. 또 한 예로 이른바 재건 사장으로 도코 도시오가가 도시바에 들어왔을 때, 도코가 먼저 통감한 것은 전임자에게 보배처럼 아낌을 받아 세력을 떨치고 있던 자들이 총제적으로 기백이 약하고 쓸모가 없는데 반해, 냉대를 받고 있던 무리들이 의외로 유능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임자가 "예예" 하고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만 하는 자만을 측근에 기용하고, 일견 수완이 있는 자는 아니지만 고언도 서슴지 않는 기골의 소유자를 멀리하고 있었던 증거였다. 인스턴트식품이란 것은 즉석에서 간단하게 요기하기는 괜찮지만 진짜의 맛을 알고 있는 자로서는 계속해서 먹기는 어렵다. 경영도 마찬가지여서 "예예" 하고 추종만 일삼는 자는 처음에는 좋지만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도금이 벗겨져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 되어버린다. 안이하게 선택하지 말고 다소 괴롭더라도 나쁜 점을 말해 주는 사람을 부하로 만들어 두어야 한다.

 

3. 라이벌에게 배울 것.

한 회사가 어떤 상품에 크게 성공을 거두면 너도 나도 하고 거기에 달려드는 것이 일본 기업의 상태이다. 그런 만큼 라이벌 회사의 일거일동을 주시, 정보수집에 여념이 없다. 이것도 격렬한 기업전쟁을 이겨 나가는 하나의 지혜임에는 맞지만, 이것은 지지 않기 위한 전술이지 이기기 위한 전술일 수는 없다. 같은 라이벌에게서 배우더라도 거기에서 그가 무엇을 했는가를 배우는 것과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를 배우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초고층 빌딩 시대의 막을 연 미쓰이 부동산의 에도 히데오가 사장에 취임할 당시 미쓰이 부동산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빌딩이라면 미쓰비시 지소의 마루 빌딩이 대표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미쓰이 부동산은 미쓰비시 지소의 영업이익의 반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4년 후 미쓰이 부동산의 영업이익은 미쓰비시 지소의 영업이익을 따라잡았고 주가는 배 이상으로 올리게 되었다. 이것은 에도 히데오가 이사, 상무시대부터 라이벌인 미쓰비시의 장점을 연구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함과 동시에 상대가 훌륭한 방법으로 이룩하고 있는 부분을 연구했기 때문이다. 미쓰비시 지소는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부터 대지주로서 발전해 온 만큼 기존의 토지에 집착, 그 때문에 신규 조영 부문에 약산 허술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에도 히데오는 사장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게이요 토지의 조성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토지조성을 추친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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