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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경제및 돈벌이 관련

경영사례로 보는 전략법

by 돈굴이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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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지 말 것.

과거 마이니치 신문과 닛칸 고교 신문이 보도한 야하다 제철과 후지 제철의 합병 담은 그야말로 종전 후의 대히트 기삿거리로 신문 사상에 빛나는 금자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야하다나 후지 같은 일본의 대표적 회사가 합병이라는 중대 뉴스를 2개사에 대해서만 특종 형식으로 허용했다는 것은 중대 신문기자가 가지는 습관적 상식으로써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하 간에 이 특종 사건을 계기로 합병 문제는 급속히 실현에로 내닫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표주박에서 망아지가 나온다는 식이 되었지만 사건의 과정을 살펴보면 시대의 조류를 탄 결과이다. 야하다와 후지의 합병은 후지 사장인 나가노 시게오가 제창 여기에 야하다 사장인 이나야마 요시히로가 동조, 다시 차츰 고깅 행장 나카야마 소헤이와 통산차관, 야마모도 시게노부가 금융, 행정면에서 찬동, 말하자면 4자 합의의 토대 위에서 극비리에 진척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제정세와 철강업계의 정세에 비추어 조만간 애드벌룬을 띄울 의견 통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인 타협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후지의 나가노가 여행자인 시코쿠 나루도에서 공식론 혹은 이상론으로써의 야하다와 후지 합병론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마이니치 신문의 일면 톱기사로 크게 보도되어 결과적으로는 애드벌룬이 되어버렸다. 그때 나가노는 이런 이야기는 도쿄에서라면 문제가 안 되는 것인데.라고 말했다.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가노는 이 톱기사를 교묘히 이용했다. 이 기사가 나오자 즉시 나타난 반응을 보면 양사의 노동조합이 전술적으로 일단 반대한 이외에는 이른바 여론은 거의 찬성, 환영하고 있다. 그때 절호의 찬스, 이 조류를 타지 않으면. 하고 생각한 나가노는 하네다 공항에 내려 기자회견에 임하자 합병 필지론을 펴고 다음날 아침부터 본격적인 활약을 전개, 그러는 동안에 합병 무드를 조성해 갔다. 마찬가지 이야기를 야하다의 이나야마에 대해서도 할 수가 있다. 나가노의 여행지에서의 담화 때문에 신문기자가 갑자기 찾아왔을 때 한동안 당황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나야 마도 나가노에 동조했다. 철강계의 현황을 보고 또 오지, 혼슈, 쥬조의 합병이 발표된 직후여서 이른바 합병 무드가 높아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합병은 말하자면 매스컴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거기에 나가노, 이나야마라는 천하의 명배우가 등장함으로써 실현됐다. 조간에서 석간 그리고 이튿날 아침의 기자회견에 있어서의 정식 발표라는 식으로 불과 24시간 동안에 이른바 임기응변의 결과로 보기 좋게 성공했다. 만일 이것이 다른 엉터리 배우였다면 허둥지둥 당황하기가 십상이고 요령부득의 답변을 일삼아 매스컴 앞에 추태를 연출했을 것이다.

 

2. 모두가 서쪽으로 갈 때는 동쪽으로 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종전 직전 도쿄가 전화에 휩쓸려 있을 때의 일이다. 도쿄 아오야마의 주택가도 폭격을 당해 수많은 이재민들은 일제히 메이지 신궁을 향해 도망쳤다. 그 같은 명령이 사전에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바람의 방향을 보고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가족의 손을 이끌고 반대방향으로 도망친 사나이가 있었다. 신궁 방면으로 피난을 간 사람은 인파와 연기와 바람과 먼지 때문에 그 태반이 사망했지만 이 사나이만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사나이야말로 다름 아닌 후지 은행의 행장으로서 바야흐로 재계에 이름을 떨친 이와사 요시자네이다. 때아 장소에 따라서는 일부러 반대방향으로 간다는 이 이와사의 결단력이 오늘날의 후지 은행의 융성을 가져오게 했다. 후지 은행은 전쟁 전에는 야스다 은행으로 불렸지만, 종전 후의 재벌해체로 후지 은행이라고 개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후지뿐만 아니라 미쓰비시가 지요다로 스미토모가 오사카로 개칭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 환원이 허용되었는데 후지만은 굳이 구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기회에 명실공히 재벌은행의 체취를 청산하고 일본 제일의 후지산을 목표로 일본 제일의 서민은행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그 염원은 훌륭히 성취됐다. 동시에 후지는 새로운 시대에의 움직임을 예견, 당시 다른 은행이 경원한 정부, 도쿄도, 전매공사, 국철 등의 이른바 관 금회계를 적극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미쓰이 은행의 총재로서 전쟁 전의 일본 금융계에 군림한 이케다 세이 힝 같은 사람은 이 관금취급을 가장 꺼려했다고 하지만 후지는 두려움 없이 뛰어들었다. 그것을 해낸 주역이 당시 상무였던 이와사였다. 그 결과 후지는 스미토모, 미쓰비시, 상와 등 4개 은행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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